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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람)

시민케인, 영화인이 뽑는 올타임 레전드 1위영화

by 소소한 일상.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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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케인 이야기

1940년 뉴욕에서 찰스 포스터 케인이 죽었습니다. 그는 손꼽히는 부자였으나 죽기 직전에 플로리다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전에는 권력가들과도 친분이 있었고 정치에도 손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잡지 편집장인 록스턴은 취재기자인 제리 톰슨에게 케인이 죽기전 이야기했다는 '로즈버드'의 뜻을 알아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취재 기자는 케인에 대해 알아가게 되고 케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찰스 포스터 케인은 1862년 콜로라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에 있던 하숙생이 준 쓸모없는 광산에서 노다지를 발견하고 케인 가족은 벼락부자가 됩니다. 케인의 어머니는 케인을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시켜 기회를 주고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동부에 거주하는 재력가에게 어린 케인과 광산 운영권과 수익을 맡기게 됩니다. 그 돈으로 케인은 상류층의 삶을 누리며 자랍니다. 케인이 성장하면 그 때 광산 소유권과 수익금을 전달하기로 합니다. 케인이 2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찾고 뉴욕 신문사인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합니다. 처음에는 발행부수가 적고 만성적자에 시달리지만 그에 막대한 돈으로 적자를 메꾸며 버티다 결국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900년 케인은 대통령의 질녀와 결혼하고 정치 쪽 연줄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케인은 미모의 여가수와 사랑에 빠지며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선거를 준비하던 그는 스캔들로 인해 낙선하게 됩니다. 그 이후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게 됩니다. 케인은 미모의 여가수와 결국 결혼을 하고 그녀를 가수로 데뷔시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케인은 지속적으로 그녀에게 노래를 강요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살을 하려하고 케인은 그만두게 됩니다. 그러다 케인의 신문사가 문을 닫게 되고 수전마저 케인을 떠나게 됩니다. 혼자가 된 케인은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취재 기자인 톰슨은 끝까지 로즈버드의 뜻을 알아내지 못하고 케인의 비극적인 최후를 보며 동정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톰슨은 케인이 마지막에 말한 로즈버드는 그가 가지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무언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케인이 죽고 나서 그의 값비싼 물건들은 경매로 팔려가기 위해 쌓이고 쓸모 없는 물건들은 불에 태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린 시절에 즐겨 탄 썰매가 불에 타게 되었는데, 그 썰매에 적혀있는 문구가 바로 로즈버드였습니다. 결국 부와 명예를 다 가진 그가 마지막에 그리워한 것은 그의 소박했던 어린시절이었습니다.

 

제작 뒷 이야기

 현대 영화인들이 뽑는 영화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는 시민케인의 감독은 제작 뿐 아니라 주연까지 연기한 오슨 웰스입니다. 심지어 당시 25세였던 오슨 웰스는 이작품이 데뷔작이었습니다. 또한 전설적인 영화 음악가 버나드 허먼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오슨 웰스는 촬영 전 <역마차>를 40번 넘게 보며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케인 역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연기를 했는데 자연스러운 분장을 위해 노력을 쏟았습니다. 분장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촬영 때 오슨 웰스는 수전 역을 맡은 도러시 커밍고어에게만은 배우들과 스텝들 앞에서 모욕을 주는 등 좋지 않은 대우를 했다고 합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워릭이 왜 그런식으로 그녀를 대하는지 물었는데, 웰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진심으로 본인을 증오해야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영화 <샤이닝>에서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여주인공인 셜리 듀발에게 대한 것과 같습니다. 그 영화에서도 셜리 듀발을 고의적으로 그녀가 심리적으로 무너지게 만들었는데 결국 그녀는 그 영화 이후 공황장애 등을 겪으며 인생 하락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스탠리 큐브릭을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위 사진은 인터넷 상에서 많이 돌아다니지만 정작 시민케인에서 나온 것인지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호평

 시민 케인이 개봉한 당시 몇몇 미국 평론가들은 '위대한 업적'이라고 극찬하였으나 홍보 실패로 당시에 주목받지 못한 영화였습니다. 아카데미에서 7개상에 노미네이트 되긴 하였지만 각본상만을 수상하는데 그쳤습니다. 흥행에 실패하고 영화도 잊혀져 갔습니다. 그런데 1940년 후반부터 프랑스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입소문을 타고난 뒤 현재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걸작에 항상 뽑히게 되었습니다.

 

 호평에 대한 이유로는 '영화 문법의 종합과 강렬한 시각성'과 '혁신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을 꼽습니다.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미장센과 딥 포커스라는 신기술 및 거울 이미지의 활용으로 가능성을 드넓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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