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유튜브 채널 '역사를 보다'의 흥미로운 영상을 통해 조선시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재미있는 사실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과연 모든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을까요? 왕들도 점을 보고, 미신을 믿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지금부터 놀라운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1. 목숨을 건 등용문, 조선의 과거시험
오늘날의 수능만큼이나 치열했던 조선시대 과거시험! 하지만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지방 선비가 한양까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은 호랑이와 도적떼의 위협이 도사리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한 시험장에서는 온갖 부정행위가 판을 쳤다고 하는데요. 소매는 물론, 심지어 콧구멍에 커닝 페이퍼를 숨기는 수험생도 있었다니, 그 절박함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2. 왕들도 흔들렸다! 궁궐을 뒤흔든 미신과 저주
조선의 왕들은 과연 미신을 믿었을까요? 정답은 '그렇다'입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장희빈의 저주 사건이죠. 장희빈이 인현왕후의 처소에 흉물(죽은 쥐, 새 등)을 묻고 저주 인형을 찌르는 등 저주 활동을 벌인 것을 숙종이 직접 목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비록 인현왕후의 실제 사인은 병사였지만, 이 사건은 장희빈이 사약을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이 직접 점을 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2대 왕 정종이 수도를 다시 개성으로 옮기자, 훗날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은 한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종묘에 가서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쳤고, '한양은 2길 1흉, 개경은 1길 2흉'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이를 명분으로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3. 땅의 기운이 국운을 좌우한다! 풍수지리와 국가 대사
미신은 국가의 중대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광해군은 풍수지리가의 말을 듣고 수도를 지금의 파주 교하로 옮기려다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로 중단했습니다.
왕릉의 위치는 더욱 중요했죠. 세종대왕의 영릉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원래 아버지 태종의 무덤 곁에 있던 세종의 능은 풍수적으로 좋지 않아 장손이 단명하고 후사가 끊길 자리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문종, 단종,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결국 지금의 여주로 무덤을 옮기게 됩니다.
4. 검은 갓을 쓴 저승사자, 사실은 조선시대에 없었다?
드라마 '도깨비'나 '전설의 고향'에서 본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미지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저승사자의 모습은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현대에 창작된 이미지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는 믿었지만, 지금처럼 정형화된 저승사자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사실! 정말 흥미롭지 않나요?
5. 조선시대의 호텔, '주막' 이야기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와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의 숙소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주막입니다. 주막은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는 오늘날의 호텔이자 휴게소 같은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지명에 남아있는 퇴계원, 조치원, 사리원 등의 '원(院)'은 본래 공무원들이 묵던 숙소(역원)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강진 유배 시절, 처음에는 주막(사의재)에 머물렀다고 하니, 주막이 당시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떠셨나요? 조선시대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인간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지 않나요?
재밌게 봤던 영상을 요약해 봤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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